거대로봇 연구서설 - 이데온 편 -

* 이데온의 우울 - 전설거신과 몰살의 토미노 -

'기동전사 건담'이 아직 본격적인 재평가를 받기 전, 새로운 방송사와 스폰서의 협력을 얻게 된 토미노는 '스페이스 런어웨이 간드로와'라는 새로운 작품의 제작에 착수한다. 이 작품의 컨셉은 '기동전사 건담'의 초기 기획 중 하나였던 '건보이'를 바탕으로 하고 있었는데, 외계인의 공격을 피해 소년소녀들만 타고 있는 전함이 도피행을 계속한다는 내용이나, 주역 메카가 3단 합체 로봇이라는 등 기본적인 설정은 이 '건보이'의 것을 그대로 계승하였다. 이후 '전설거신 이데온'이라는 이름으로 1980년에 발표된 이 작품에서 토미노는 전작 '건담' 이상의 장대한 스케일로 인류 그 자체의 어리석음을 날카롭게 비판하는 작품을 그려내려고 했다.

이 작품은 기본적으로는 같은 지구인끼리의 싸움을 그렸던 '기동전사 건담'과는 달리, 지구인과 외계인의 싸움을 그리는 전통적인 슈퍼로봇물의 구도를 취하고 있으면서도, 그 내막을 살펴보면 같은 지구인끼리도 서로 탐욕에 눈이 멀어 끝없는 싸움만을 계속하고 있는 당시의 냉전구조를 날카롭게 꼬집은 작품이기도 했다.

실제로 지구인과 외계인 바프 크란은 서로 사랑할 수도 있고 그 사이에서 아이까지 생겨날 정도로 육체적, 심정적으로 매우 가까운 존재였지만, 충분히 서로간의 화해와 상생의 여지가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궁극의 '힘'을 앞에 두고 탐욕에 눈이 멀어버린 그들이 보여준 것은 지금까지 등장했던 그 어떤 이질적인 존재의 싸움보다도 더욱 어리석고 처참한 파괴행위 뿐이었다.

이 작품의 주역 메카이자 이야기의 핵심이 되는 전설의 로봇 이데온과, 그 이데온을 움직이는 무한력 이데는, 마치 현실의 핵에너지와도 같이 인간이 다루기에는 너무나 강대하고 위험한 힘을 상징함과 동시에, 인간이 이해할 수 있는 영역 너머에 존재하는 신의 섭리를 상징하기도 하는 이중적인 의미를 가지고 있었는데, 강대한 힘을 손에 넣었으면서도 그 힘을 제어할 수 없었기에 스스로를 지켜내기에도 힘겨워했던 지구인 소년들의 모습과, 살아남기 위해서라는 이유로 거대한 힘을 갈구했으면서도 결국은 그 욕심으로 인해 그들 자신의 파멸을 재촉하고 만 바프 크란의 모습은 그대로 현실에 존재하는 인류의 어리석음을 은유하는 것으로 볼 수 있다.

이데온은 우선 그 디자인부터가 매우 특이했다. 당시의 다른 슈퍼로봇들조차 능가하는 복잡한 3단변형합체 구조와, 이와는 대조적으로 인간의 얼굴형상을 스스로 포기함으로서 감정이입의 여지가 제거된 고글형의 얼굴은 막강한 힘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그 탑승자와 결코 하나가 되지 못하는 이데온의 속성을 그대로 드러내주었다.

또한, 작품 중에서 선보인 이데온의 파워는 일격으로 행성을 파괴해버릴 정도로 막강한 것이었는데, 파일럿들의 의지와는 별개로 발현하여, 역시 파일럿들의 예측을 초월하는 결과를 만들어내는 이러한 이데온의 힘은, 이미 슈퍼로봇의 강력한 파워에 익숙해졌던 시청자들조차 압도해버릴 정도의 '절대적인 힘'으로서의 이데온의 속성을 뚜렷히 드러내 주었다.

하지만 방영당초 '전설거신 이데온'의 평가는 처참할 정도로 낮았다. 우선 제작여건의 악화로 1~13화 사이의 분량은 연출도, 작화도 매우 불안하여 방영초기부터 시청자들의 눈을 끄는데 실패하였으며, 이는 '기동전사 건담'의 매력에 한발 일찍 눈을 뜨고 토미노 감독의 신작에 대해서도 많은 기대를 걸고 있었던 소수의 지지자들은 물론, 심지어는 건담 붐의 한 축을 맡았었던 애니메이션 잡지들에게서 조차 '실패작'이라고 외면당하는 결과로 이어졌다.

그러나 14화 이후 어느정도 내용도, 작화도 안정되고 당시 점점 커져가던 '건담'의 붐 덕분에 새로운 지지층도 어느정도 생겨나기 시작하면서 이데온의 평가는 차츰 변화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어디까지나 아동 대상의 작품을 기대했던 방송사와 스폰서는 건담 이상으로 어두운 작풍과 완구의 판매부진으로 인해, 종료를 4화 앞두고 이데온의 방영을 중단시키고 말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뒤늦은 '건담'의 기록적인 히트로 인해 다시 힘을 얻은 토미노는 극장판 '기동전사 건담' 3부작이 완결되는 즉시 이데온의 나머지 4화 분량을 극장용 작품으로 제작하게 된다. '발동편'이라고 이름붙여져 TV 총집편인 '접촉편'과 함께 82년 7월에 개봉된 신작 극장판의 작화와 연출은 이미 TV판 초반과는 비교도 되지 않는 높은 수준에 이르렀고, 완전히 자신감을 회복한 토미노 감독은 TV판 그대로였다면 불가능했을지도 모르는 참혹하면서도 절망적인 전개와 대담한 결말을 보여주었다.

다소나마 화해의 여지를 남기고 있었던 TV판 마지막 부분의 희망적인 전개는 '발동편'에 들어와서 무참히 짓밟혔다. 소녀의 목이 잘라져 둥둥 떠다니고 친언니가 여동생의 얼굴을 총으로 쏘아 꿰뚫는 처참한 비극이 이어지는 가운데, 결국 바프 크란의 최종병기에 자극받아 발동된 무한력 이데의 폭주는 두 별의 인류와 그들이 만들어낸 모든 것을 파괴해버리고 말지만, 동시에 어리석은 인간의 정신세계를 초월한 그 힘의 발현은 두 별 사람들의 사랑의 결정체였던 '메시아'를 통해 이미 스스로의 손으로 절망의 문턱에 들어섰던 이들에게 영혼의 해방이라는 구원을 내려준다는 결말을 맞는다.

이 두 가지 상반된 의미를 내포하고 있던 결말은 공개이후 격렬한 찬반양론을 낳으며 매니아들 사이의 논쟁의 대상이 되었고, 이 과정에서 자기 작품의 등장인물들을 단 한명도 남겨두지 않고 잔혹하게 죽여버린 토미노 요시유키는 '皆殺しの富野'(몰살의 토미노)라는 명예롭지 못한 별명을 얻기도 하였다.

어쨌든, 이러한 논쟁을 통해 당시 하나의 뚜렷한 집단으로서 굳어져가기 시작했던 '오타쿠'들은 일반인의 상식과는 유리된 그들만의 세계를 더욱 강화해 나가게 되지만, 이미 대중적인 설득력을 잃어버린 '이데온'을 대신하여 토미노 감독과 선라이즈는 '건담'의 인기를 이어갈 수 있는 보다 온건한 리얼로봇 작품을 모색하게 된다.

written by 백금기사(lgaim.egloos.com)

by 백금기사 | 2006/05/23 11:08 | 거대로봇 연구서설 | 트랙백(1) | 덧글(0)

트랙백 주소 : http://lgaim.egloos.com/tb/1332571
☞ 내 이글루에 이 글과 관련된 글 쓰기 (트랙백 보내기) [도움말]
Tracked from 엘렌 실:라 루:멘 오.. at 2009/06/26 11:29

제목 : Ani Index: 전설거신 이데온 (1980)
ⓒ SUNRISE ◈ 총감독: 토미노 요시유키 (용자 라이딘, 무적초인 점보트3, 기동전사 건담, 성전사 단바인, 중전기 엘가임, 기동전사 Z 건담, 기동전사 ZZ 건담, 역습의 샤아 등 다수) ◈ 원작: 토미노 요시유키, 야다테 하지메 ◈ 스토리보드: 토미노 요시유키, 타키자와 토시후미 (더티 페어 TV, 푸른 유성 SPT 레이즈너 감독 / 기동전사 Z 건담, ZZ건담 스토리보드) 外 ◈ 에피소드 감독: 타키자와 토시후미 外 ◈ 캐릭터 디.....more

:         :

:

비공개 덧글

◀ 이전 페이지          다음 페이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