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대로봇은 누구를 위해 싸우나? (6)

다이탄 3의 적인 메가노이드는 상당히 이색적인 적입니다. 이들은 다른 작품의 적들처럼 인류를 무력으로 공격해서 제압하기보다는, 인류 사회 내부로 침투해 자신들의 동족을 늘리는 수법을 기본으로 하고 있습니다. 그렇기에 이들과 맞서 싸우는 하란반죠의 전략은 이들 메가노이드들을 발견, 색출해낸 뒤 제거하는 방식이 기본적입니다. 따라서 첩보전의 색채가 강하죠.

사실 메가노이드들도 기본적으로는 인간이고, 원래는 우주 개척을 위한 개조인간으로 만들어졌지만 개조된 육체에 맞게 자아를 강화하는 과정에서 이기심과 자만심이 강해져버리는 부작용이 생겨나고 말았죠. 이들은 전 인류를 자신들과 같은 메가노이드로 개조하기 위해 갖가지 음모를 꾸미고 이 과정에서 메가노이드를 증오하는 하란반죠와 충돌하는 것입니다.

결국 하란반죠의 싸움은 육체와 함께 정신마저 왜곡된 메가노이드의 손에서 인간의 존엄성을 지킨다는 명분을 갖고 있는 한편, 가족들을 메가노이드 실험으로 죽여버린(그리고 아마 자신까지 개조한) 아버지에 대한 분노와 복수심이 뒤섞여있기도 합니다. 어찌됐든 하란반죠과 다이탄 3의 전투는 다른 거대로봇물과는 달리 상당히 개인적인 차원으로 보입니다.

지금까지, 우선 '기동전사 건담' 이전까지의 몇몇 거대로봇 작품들에 등장하는 적들에 대해 알아봤습니다. 이들의 대부분은 인류 문명이나 인류라는 종족 자체를 파괴하기 위해 공격해온 '인류의 적'들이고, 이에 맞선 거대로봇들은 현생 인류의 현상 유지를 위해서 싸운다고 할 수 있겠습니다. 이것이 거대로봇물에서 주장하는 '정의'라 할 수 있겠군요.

확실히 이 시기까지 만들어진 거대로봇물 중, 순수한 인류끼리의 전투가 그려지는 작품은 '철인 28호'와 '혹성로보 당가도 A'의 두 작품 뿐입니다. 그나마 두 작품 모두 본격적인 인류끼리의 '전쟁'을 그리지는 않았죠. 이것이 '기동전사 건담' 이전의 거대로봇물이 갖고 있었던 일종의 한계라 할 수 있지만, 그렇기에 이런 작품들은 손쉽게 '정의'를 보여줄 수가 있었습니다.

사실 이런 식의 '정의'는 실제 인류사에 있어서도 가장 오래된 형태의 '정의' 중 하나입니다. 야생동물이나 자연 재해 등 외부의 위협에 맞서서 공동체를 유지하는 행위는 인류 역사가 시작되면서부터 '정의'로 인식되어 왔죠. 이후에 이것이 인류 내부의 투쟁에도 적용되면서 소위 '정의'라는 개념의 상대화와 변질이 시작된 것이고요.

그런만큼 초기 거대로봇물과 그 이전의 특촬 히어로물에서 그려지는 '정의'는 그야말로 선사시대에나 있을 수 있었던 순수하고 절대적인 정의의 개념을 현대에 다시 되살린 것이 시청자들의 본능을 자극했다고 할 수 있겠습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인류가 선사시대만큼이나 위험한 상태로 돌아가야 한다는 별로 유쾌하지 않은 대전제가 필요하지만요.

결론적으로 슈퍼로봇물에서 그려지는 '정의'가 제대로 실현되기 위해서는, 인류가 그동안 이룬 문명의 성과를 부정할 수 있을만한 강대한 위협이 인류 앞에 출현해야 하고, 그 앞에서 인류는 마치 선사시대 사람들마냥 두려워 떨지 않으면 안된다는 것입니다. 그런 상황에서는 완전히 미친 사람 몇몇을 제외하면 모두가 살아남기 위한 일치된 '정의'를 찾게 마련이지요.

하지만 그런 극단적인 전개도 많이 반복되면 지겨워집니다. 선사시대 사람들처럼 벌벌 떠는 인류를, 신이나 영웅과 같은 위대한 존재가 구해준다는 패턴은 확실히 사람들에게 효과적으로 전달되는 원형적 이미지이긴 하지만, 거대로봇물의 문제는 이런 소재를 단기간에 너무 많이 써먹었다는 것입니다. 그 결과 드디어 이런 신화적 모티브에서의 일탈이 시작되는 것이죠.

written by 백금기사(lgaim.egloo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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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백금기사 | 2008/06/24 00:41 | 로봇 파라다이스 | 트랙백 | 덧글(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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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mmented by Hineo at 2008/06/24 00:54
다음화부터 드디어 군담(...)이 나오는군요. 그렇게 본다면 건담이 '슈퍼로봇의 모습을 보이면서도 리얼로봇의 효시'라 할 수 있는 이유가 나오는 것 같습니다.
Commented by 백금기사 at 2008/06/25 00:09
싸움의 중심이 개인의 생존이라는 보다 절박한 문제로 가면서 새로운 드라마가 생겨나는 거죠.
Commented by 건담=드렌져 at 2008/06/24 02:18
토미노옹의 슈퍼로봇은 기존의 로봇물의 한 획을 그은 인물이죠......^-^;;;
Commented by 백금기사 at 2008/06/25 00:10
그 분은 뭘 해도 한 획을 그으시죠.
Commented by draco21 at 2008/06/24 02:32
.... 여명기가 지나.. 본격적인 인간 세계의 부조리가 그려지는겁니까, ^^: 그러고보면 유행은 돌고 돈다고 봐도, 아무리 아이들 대상이라고 해도, 사회와, 세상의 발전에 따라 거대로봇물도 분명히 치밀해지고 발전하고 있다는 생각은 듭니다. ... 침체기라고 해도 말이지요... ^^:
Commented by 백금기사 at 2008/06/25 00:10
인간 세계의 부조리라기보다는... 고대 신화에서 중세 전설의 플롯으로 넘어오는 단계죠.
Commented by 레이트 at 2008/06/24 08:07
이제 건담이 시작되는 군요.... 요즘들어 가끔식 다이탄을 보면서 생각하는 건대 토미노옹은 정말 굉장하신 분이라는 걸 새삼 깨닽게 합니다. 하란반죠가 이리도 매력적인 캐릭터라니....
Commented by 백금기사 at 2008/06/25 00:11
오죽하면 다이탄 안 나오는 소설까지 나왔겠습니까.
Commented by 존다리안 at 2008/06/24 10:13
다이탄의 적/아군 구도를 보며 가오가이가 생각이 났습니다. EI-01의 지구 장악 계획이 저런식이었거든요.
Commented by 백금기사 at 2008/06/25 00:11
가오가이가 자체가 선라이즈 로봇 집대성작이라, 분명 영향이 있겠죠.
Commented by 시무언 at 2008/06/24 10:18
확실히 슈퍼로봇물은 전체 흐름을 보면 신화적인 색체가 강했죠. 그런데 이제 리얼로봇물로 변하며 그 신화적인 느낌은 모조리 사라진 느낌입니다(보톰즈 정도라면 예외가 될까요?)
Commented by 백금기사 at 2008/06/25 00:12
리얼로봇의 영향을 받은 뒤의 슈퍼로봇에서도 신화적 색채는 많이 탈색되죠.
Commented by phice at 2008/06/24 13:04
개인중심사회를 반영한다고 보기엔 좀 그런가요?
Commented by 백금기사 at 2008/06/25 00:13
그것보다는 좀 더 복잡한 문제인 것 같습니다만.
Commented by ZeX at 2008/06/24 15:57
철인 28호도... 원판은 모르겠지만 태양의 사자판에선 후반부에 뜬금없이 외계 침략자가 등장했지요. (...)
Commented by 백금기사 at 2008/06/25 00:13
진짜 뜬금없었죠.
Commented by 잠본이 at 2008/06/25 20:57
하란반조가 끝까지 인간인지 개조받은건지 밝혀지지 않은 채 어디론가 떠난다는 얘기를(아직 얘기만) 듣고 블레이드러너가 떠올랐습니다 (리들리 아저씨가 다이탄을 봤나...)
Commented by 유우지 at 2008/06/26 18:07
원작에선 안밝혀졌지만 2차 창작물(?)인 SRW시리즈에서는 완전한 메가노이드라는 떡밥을 계속 투척해주고 있죠.
Commented by 백금기사 at 2008/06/26 23:00
어차피 정통 속편은 이제 만들고 싶어도 다시는 못 만들 겁니다... (으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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